박정희 대통령과 요시다 수상의 공통점
나는 식사 후 30분 정도 지나 금방 달아나는 것 같기는 했으나,
약속 시간이 너무 초과했다고 말하고 다시 일어서려고 하자 "오늘 오후는 아무런 예정이 없습니다."라고
그는 다시 만류했다.
이미 나의 노리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몸습은 사라지고 지기 박정희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 남짓 다시 이야기에 열중했다.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당시 대통령 대변인, 현재는 문화공보부 장관 김성진 씨한테 들은 얘기를 상기하고
그것이 사실인지 물어보았다. 그 이야기란 이러하다.
대통령 일행이 어딘가 시찰하러 갔을 때 도중 갈림길에서 보통때면 직진해야 될 곳인데 자동차가 급히 우회전했다.
"왜 돌아가려 하는가?"라고 대통령이 묻자 보좌관이 "대학 분쟁으로 경찰과 학생이 대치하고 있고
학생들의 투석이 격력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한 모양인데 대통령은 즉시 "괜찮으니 원래 길로 가자."라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명령대로 그 길로 갔는데 얼마 안 가서 데모 중인 그 학교 앞에 당도하자 대통령은
자동차를 세우고 뛰어내려 혼자서 대학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고 한다.
놀란 것은 학생측으로서 즉시 투석을 그치고 뿔뿔이 달아났다고 한다.
대통령은 그 길로 총장실에 들어가 총장을 불러오라고 명령했는데
이미 자택으로 도망가 버렸던 총장이 나타난 것은 수십 분 후였다.
기절할 것 같았던 그에게 대통령은 차근 차근 타일렀다고 한다.
"이럴때일수록 총장이 책임을 지고 학생을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 물음에 대통령은, "아,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일로 학생들이 설득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총장이란 사람은 소동의 경과를 보고 있으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는 내 마음에 새겨져 있던 "유사시에는 서울에서 일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말과 맥락을 같이 하는 대답이었다.
이런 일을 두고 사람들이 그를 '독재자'라고 말하는지.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민주제보다 독재제를 택하겠다.
과거 요시다 시게루는 'one man'이라고 호칭되고 대미 추종 외교를 한다고
비난받았으며 장기 집권한다고 일본 국민이 싫증내고 미워했다.
이런 점에서 박 대통령은 요시다 씨와 많이 닮았다.
1954년 초 내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일본 담당 관리들의 초청을 받아 식사를 함께 했는데
"요시다 초리만큼 고집 센 사람도 없다. 미국에 대들기만 한다."고 해서
일본 내 평가와 전혀 다른 데 놀랐던 사실을 기억한다. 박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지 않았을까.
미국을 가까이 끌어당겨 놓아야 한다는 데 전심 전력을 기울이는 이면에,
이러한 한국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국산, 그것도 이제는 도가 지나쳐 고장투성이인
민주주의를 강요하는 미국에 대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미국에 대한 기대와 불신, 이 딜레마는 최초의 회견시에도 엿보였다.
물론 이 딜레마는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는 기대 쪽이 강하고 불신이라기보다는 곤혹의 형태로 나타났다.

소박한 서민, 한국인의 애환과 숨결을 읽을 줄 알았던 토종한국인

▲대통령의 수채화

민족중흥, 조국근대화가 삶의 본질 그 자체였 던 대통령
어깨를 흔들면서 웃던 대통령
금년 9월 세 번째 회견 때 나는 "카터 대통령이 인권 외교를 한국에 적용하는 것은 내정 간섭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결론적으로 간접 침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각하를 독재자라고 부른다면 카터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독재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한 미군 철수에 반대한 싱글러브 소장을 해임하는가 하면,
아마 디트로이트에선가 시카고에서 '워시 터을 상대하지 않고
자기 편은 인민 대중뿐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으니까요.'"라고 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그러나 동경 서미트 후에 여기에 왔다간 후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상을 가지고 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고 대답하였다.
나도 동감이었다. 주한 미군 철수의 잠정 동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 그 전날 호텔 텔레비전으로 ㅌ카터 대통령의 서울 방문과
그 환영 상황을 한 시간 정도 보고 있었지만 눈으로는 볼 스 없는 '인권 억압'은 별개로 하더라도
서울의 시민 생활은 일본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공기가 넘쳐 흐르고 있는 것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눈으로 확실히 확인했음에 틀림없다.
오히려 환영의 깃발을 흔드는 민중은 있어도 그거슬 단속하는 경찰관은 전혀 눈에 뜨이지 않았다.
혹시 카터 씨는 일본 쪽이 훨씬 경찰 국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박 대통령에게 "독재자에게는 도재자가 안 보였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농담을 하였더니
대통령은 어깨를 흔들면서 웃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대통령의 불신은 주한 미군 철수 동결만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가 보았다.
그 대가로 미국측은 끈질기게 '개방된 민주주의 사회'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 베트남 공작의 잘못을 한국에섯까지 저지르려고 하고 있는 것일까. 박 대통령보다는 내가 더 분노를 느낀다.
미국은 물론 일본도 다음의 중요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전쟁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20대 후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북쪽의 위협이라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 때문에 소비 생활이나 언론 자유에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한편 미국 유학에서 테크노크라트의 우수성을 인정한다 해도 그 재능이나 능률은 평화시를 전제로 할 때만 십분 발휘된다.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휴전선의 벽을 그늘에서 지켜 주는 힘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 기능이 훌륭히 수행되어 북의 침공을 억지하는 성과를 올리면 올릴수록 겨우 40km후방의 서울에서는 그 벽을 지탱하고 있는 힘의 존재가 보이지 않게 되고,
또한 그 너머에서 끊임없이 이쪽을 노리고 있는 북한의 위협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에어 포켓이된다.
"새마을 운동이 쉽게 말하면 잘살기 운동 이다" 하면된다"는 의지로 근대화에 박차를 가 하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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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이 그리신 풍경화

서독을 방문중 공항에서 독일의장대사열을 받 고 있는 대통령 (1964)
오일 쇼크보다 더 큰 쇼크
지금까지 무제한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해서 미움의 대상이 되면서도 일반 국민으로부터 경애받던 박 대통령은 이제 없다. 권력과 권위, 이 양자를 겸비한 인물이 금후 과연 나올 것인가. 일본의 한국통이라는 사람들조차 유신 체제는 더 이상 필요없으며, 적어도 완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아직은 그럴시기가 아니다. 만약 와화시키면 수습할 길이 없이 혼란이 일어나고, 다시 군사 쿠데타라는 최악의 사태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때를 노려 북한이 밀고 내려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박 대통령이 오랫동안 유신 체제를 지속해 온 데는 득이 있는가 하면 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존재는 공기와 같은 것으로서, 그 일부가 오염되었다고 해도 공기를 빼 버리는 사람은 직식사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나 일본이 끊임없이 공기를 보급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런 각오도 없이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을 나는 증오한다.

물론 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유신 체제하에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한 '한강의 기적'에 작년 말경부터 암운이 끼기 시작한 사실을 나는 아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플레가 극심하고 모터럼 새마을 운동으로 기초를 굳히게 된 민생의 향상도 한계에 부딪히고 빈부의 차도 증대되어 왔다. 제2차 오일 쇼크 때문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세계 제일의 민주주의국 부자 나라 미국도 마찬가지라댜 할 것이 아닌가. 한국의 인플레나 빈부의 차를 반드시 오일 쇼크 때문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제일 큰 원인은 주한 미국 철수를 선거 공약으로 한 카터 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이다. 이를 대비하여 한국은 군사비를 예산으 3분의 1 수준으로 증대시켰고, 9월에 다시 그 상태를 1985년까지 유지할 것을 국회에서 결의했는데, 그 주름살이 시민의 소비 생활에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저널리즘이 발전 도상국 또는 중진국에 대하여 항상 범하는 잘못은, 근대화와 선진국으로의 탈피를 늦추고 정체시키는 책임을 모두 지도자층으로 돌리고, 그들만 제거시키면 자기들과 같은 근대 사회가 이룩될 소지가 그 나라에 이미 구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체제 비판자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만약 박 대통령을 어떻게 해서라도 '독재라'라고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그러나 나는 한 나라의 원수로서 그 죽음이 국제 정치의 동향을 좌우하는 둘도 없는 인물은 유럽의 티토와 아시아의 박정희, 이 두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내가 책임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학생이나 노동자는 차치하고라도 한국 내부에서는 지금까지 박 정권에 다소 비판적이었던 사람 혹은 반체제적이었던 정치 ·언론인은 미국 저널리즘만큼 낙천적일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넘어뜨릴 수 없는 천하 장사 '독재자'를 잃은 후 가장 진퇴양난에 빠진 사람은 그들이다. 안심하고 무책임한 반체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심하고 무책임한 반체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번 내닫기 시작하면 그것을 정지시켜 줄 두꺼운 벽이 이제는 없어졌고, 북한에까지 달려가지 않으면 끝장이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미금오산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 기념비 (1996) 쓰레기로 더렵혀진 금오산을 청소하시면서

▲청와대 정원, 뒤에 보이는 2층 건물은 비서관들이 집무하는 곳이다.
독재자를 애도하는 수많은 민중들
10월 28일경부터 국장 전인 11월 2일까지 서울시를 비롯해 전국 시·읍·면에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귀국 후 들으니 분향자 수는 인구 3,700만 중 2,000만에 달했다고 한다.
인구의 5분의 1이 모여 있는 서울에서는 민중들이 분향을 위해 장사진을 이루었고
모두 비통한 표정이었으며 우는 사람도 많았다. TV에서는
박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생전의 사진을 차례차례로 비추고 있었는데
호텔 여종업원은 나의 방을 청소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이와 같은 얘기는 배우들한테서도 들었다.
국장일에는 거리 정리를 하던 경찰관들도 이따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10월 31일 판문점 견학을 마치고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중앙청 앞 분향소에 분향하러 가는 행렬이 세종로 양측을 메운 것을 보고
안내양이 대통령에 대하여 민중이 얼마만큼의 경애의 정을 가지고 있었나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짬을 봐서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독재자라고 합니다."라고 했더니
그 순간 안내양은 언성을 높여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틀린 것입니다."라고 덤벼들었다.
비단 버스 안내양뿐만 아니라 몇 사람의 반체제 언론인도
대통령만은 별격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을 나는 들어서 안다.
둘째 딸 근영씨가 책을 읽는 모습

포항종합제철소 건선기공식에서 발파버튼을 누르는 대통령 (1967)
주변 인물을 헌신적으로 만드는 매력
'역탐지'로 이미 여러 가지 모략설을 듣고 있었으나,
그런 추리 소설의 범인 찾기에 탐닉해 있을 때가 아니다.
물론 정보부장과 경호실장 간에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 근저에는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경쟁'이 있었고, 그것이 범행의 동기였다고 나는 보고 있다.
그만큼 인간 박정희에게는 주위의 인간을 헌신적으로 만드는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남자를 반하게 만드는 남자였다.
그 '충성심 경쟁'을 독재자를 둘러싼 권력 투쟁이라는 정치상 일반적 도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떻게 해서든 범인을 찾고 싶다면 수사의 상도에 따라 박 대통령이 죽어서
가장 득을 보는 자가 누군가를 생각해 보면 된다. 북한 외에는 아무도 없다.
만약 미국이 한국에서 손을 떼는데 가장 적당한 정세를 조성하려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랴말로 억측에도 분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즉, 미국이 한국 실정에 어둡고, 지금까지도 몇 번인가 한국을 지키는 것을 일본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일본에 비해 한국에 대해 부당하게도 매정하게 굴었다.
그러한 미국을 붙잡아 놓기 위한 '우국 충정'에서 거꾸로 읍참마속한 격이 된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9월 대통령과 세 번째 회견시 나는 대통령에게 이렇게 물었다.
"실례의 말씀입니다만 각하께서도 아마 아실 것입니다.
일본에서 소련 다음으로 싫어하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외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대통령은 즉시 대답했다.
"매스컴 때문이지요." "매스컴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그밖에 또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각하께서 농촌에서 노파와 한담하실 때라든지
또 대구에서 옛 사범 학교 동기생과 간단한 안주를 놓고 막걸리를 드실 때
웃으시는 얼굴을 사진을 보아 알고 있습니다만
대체로 일본인들은 각하의 엄한 얼굴밖에 모르며 구 군인으로서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지금 한국은 군사 정치하에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으 아이젠하워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이런 일로 손해를 보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하니 대통령은
"아무래도 나 혼자 있을 때 카메라를 들이대면 웃을 수 없게 됩니다."라고 했다.
과연 나 자신도 그렇다. 혼자서는 웃을 수 없다고 내심 생각했다.
그 때였다. 대통령이 "담배 한 개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해 깜짝 놀랐다.
방에 안내되어 의자에 앉자마자 "각하께서는 담배를 피우십니까?"라고 물으니
"아니오. 여즈음 끊고 있습니다." "담배를 피워도 괜찮습니까?
설마 혐연권을 발동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피우시지요.
" 이런 대화가 있은 후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빙긋이 웃으면서 "역시 다른 사람이 피우는 것을 보면 피우고 싶어집니다.
아직은 안 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속주머니에서 담뱃갑을 끄집어내면서 "일본 Peace로 필터가없는 담배 입니다만……."이라고 했다.
그러자 "아니 좋습니다."라면서 한 개비를 뽑았다.

소박한 서민, 한국인의 애환과 숨결을 읽을 줄 알았던 토종한국인

▲대통령이 스케치한 [방울이]

가난한 농부의 아들임을 한시도 잊지 않은 대통령
국제 정세를 내다보는 안목의 소유자
그러던 중 ㅐ통령이 불쑥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일본에 가 보고 싶습니다.
정말 아내와 함께 가고 싶습니다. 이것이 나의 염원입니다.
그에 앞서 일본의 총리가 한번 와 주지 않으면 내 입장이 곤란합니다.
얼마 전에 야마시타 방위청 장관이 서울에 왔지만 나한테는 들르지 않았습니다.
외 그랬을까요?" 나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즉시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이라는 곳은 만사가 그런 식입니다.
조금 전에 각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신문이라는 독재자가 여론을 조작하고
한국을 소련 다음으로 싫어하는 나라고 날조해 버렸기 때문에
대신쯤 되면 헌법상의 주관자인 국민의 얼굴을 살펴 그 허가가 없으면 여행, 방문의 자유도 없는 실정입니다
." 대통령은 나의 농담에 천진스러이 웃었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다시 민주화, 근대화와 유신 체제라는 진지한 문제로 옮겨졌다
.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를 방문한 미국의 전 고관이 전해 준 정보라고 전제하면서
소련의 시리아에 대한 작용을 이야기하고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신형 전차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만약 제3차 대전이 시작된다고 한다면 자기는 중동에서부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말 중 가장 인상이 깊었던 말은 "5년이나 7년이 지나면
]한국과 일본이 안전 보장 조약을 체결할 시기가 올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양국이 손을 잡고
미국을 붙들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나라 한 나라가 각각 미국과 연계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위험합니다."라는 것이다.
그러부터 3개월 후인 오늘 미국이나 일본이 민주주의라는 미약에 도취하여
한국의 '독재'에 잔소리나 하고 있는 사이에 이란을 비롯하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으로 소련이 손을 뻗어 수에즈 운하, 페르시아 만을 영향권 안에 집어넣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둘러싸는 외호를 하나하나 메워가고 있어서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아도 미국을 아시아에 붙들어 놓을 수 있는 정세가 아니다.
나는 대통령의 말에 동감하면서도 " 그러나 오늘의 일본에는 한국의 다리를 잡아당기기만 하지 각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정치가가 과연 있겠습니까."라고 했을 때
아무 말도 없이 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대통령의 표정은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농부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던 대통령
내가 올린 친서
마지막 헤어질 때 여느 때 같으면 문에서 악수하고 그대로 방을 나왔으나 그 날만은 대통령이 나의 허리를 왼손으로 안으며 복도를 함께 걸어 나왔다. 조금 걷다가 나는 "괜찮습니다. 다음 달 또 찾아 뵈올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있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다시 한번 악수를 했다. 그 '다음 달', 내가 서울에 도착하여 셋째날이 되는 날 밤에 대통령은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내가 일본 정부 그 밖의 모든 공기관과 전혀 관계가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무책임한 상태에서' 금후 한·일 양국의 문화 교류에 관하여 대통령에게 약속한 두세개 현안에 대해서 답할 기회는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박정희 씨의 인품을 전심으로 경애하던 나는 그의 사후 서울의! ! 호텔에서 혼자 있을 때 아무리 해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돌아가신 후, 아들딸에게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명했던 대통령이 가족끼리만 있을 때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대성 통곡했다는 얘기를 상기 하면서.

추기(追記): 이제 와서 생각난다. 언제인가는 확실히 기억이 없으나 한번 동경에서 대통령에게 친서를 올려 "충성심 경쟁'이 여러 가지 폐해를 낳고 있는 데 대한 '간언'을 드린 적이 있다. 물론 대통령 자신이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었다. 그 편지가 과연 대통령의 손에 들어갔는지 물어 보는 것을 잊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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