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스크랩] 대한민국의 영토 대마도

대추방맹이 2012. 3. 25. 18:27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딸린 섬.

위 치 :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동경 120도, 북위 34도
면 적 : 695.9㎢
구성 : 본섬 2개와 109개섬
해안선길이 : 14.5㎞
인 구 : 약 4만5천명(약 2만명이 이주하라 주변에 거주)


기 온 : 1월평균기온 3℃, 8월평균기온 26℃, 연강우량 927.5㎜, 연강설량 15㎜

주요 농산물 : 서류·유채·마늘
주요 어획물 : 톳·병어·멸치·도미 등

섬 전체가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지이고, 산지의 계곡들은 곡벽이 험준하다. 예로부터 한국과 대륙 사이의 중계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여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부산에서 약 50km의 거리에 있어 한국과 관계가 깊었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 ·콩 등을 답례로 받는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왜구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출몰하자, 조선시대에 들어와 회유책 ·귀화정책 등을 쓰다가 세종 때에는
원정(遠征)에 나선 바 있다. 1274년 1281년 두 차례 몽고군이 상륙했다.

중심도시는 이즈하라[嚴原].중앙부의 아소만[淺茅灣]과 인공적으로 굴착된 만제키세토[萬關瀨戶:瀨戶는 水路]에 의해 상 ·하 두 섬으로 나뉜다.

취락은 북동쪽 해안의 만안(灣岸)에 집중되어 있고, 정기여객선이 하루 걸러 운행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섬의 지형이 말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어 대마도(大馬島)라 한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대마도는 원래 고구려을 거처 신라에 소속됐던 섬"

한국의 자연과 역사가 숨쉬는 섬 대마도.
경상도 계림에 속한 우리 땅이다.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되어있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라고 쓰여 있다.


또 16세기에 조선 조정이 펴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시켰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우리 영토는)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했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대마도는 한반도의 문화가 일본으로 들어가는 통로이자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일본 본토보다 오히려 한국에서 더욱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이섬에는 한일간의 숱한 애환과 역사적 사건들이 서려 있다. 섬나라 일본은 고대로부터 대륙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로 대마도를 이용했다.
험난한 뱃길을 따라 일본으로 왕래했던 신라 고려 조선의 모든 사신들은 중간기착지 대마도에서 잠시 여정의 피로를 풀고 일본 본토의 에도(江戶: 지금의 동경)로 향했다.

이같은 역사적 환경 때문에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관련된 유적이 즐비하다.
뿐만아니라 대마도 주민들은 한국인들에 대한 매우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라시대 대마도와 관련된 사건은 박제상의 죽음을 들 수 있다. 내물왕은 일본과의 교류를 위해 아들을 인질로 보내기로하고 지혜로운 박제상을 동행하게 했다.

왕자 일행이 중간기착지 대마도에 이르러 본토로 향하기 전 정박하며 휴식을 취할 때 박제상이 왕자의 침실에 짚으로 만든 인형을 재우고는 몰래 왕자를 빼돌려 신라로 탈출시켰다.이 사건으로 박제상과 사신들은 대마도에서 처형당했다. 박제상의 아내가 경주 남쪽 치술령에 올라 일본으로 간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됐다는 슬픈 이야기도 결국 대마도와 관련된 비사의 한토막이다.

구한말 항일운동가이자 대학자였던 최익현 역시 대마도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최익현이 1906년 일본군 사령부로부터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끌려간 곳이 대마도 이즈하라. 이곳에 끌려 온 최익현은 머리깎기를 거부하고 단식을 시작, 이해 11월 순국했다.

최익현의 시신은 백제인이 창건한 수선사(修善寺: 슈젠지)라는 절에 나흘간 안치했다가 부산으로 이송했는데 현재 이 절에는 91년 황수영박사(전 동국대 총장)가 중심이 된 국내 사학자들이 세운 순국비가 있다.

대마도 이즈하라에 세워진 또하나의 비석 ‘조선통신사비’는 한일 교류사의 진면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조선통신사는 토요토미의 조선침략이후 한일간 국교회복을 위해 왕래한 외교사절단으로 토쿠가와 막부시대 200년간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이 12회에 걸쳐 이뤄졌다.

조선통신사행렬은 작은 섬 대마도의 문화를 한차원 끌어올리는 역사적 대사건으로 남아 있다.
통신사 일행의 규모가 약 400~500명인데다 이들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일본 본토의 에도에서부터 마중나온 호위병과 신하들이 2천여명에 이르러 조선통신사가 대마도에 도착하면 이 섬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일본 역사자료에는 매년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향하는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식량과 의전으로 고민하던 대마도 도주의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통신사 행렬의 장엄했던 규모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를 맞이했던 이즈하라 성문은 지금도 그 이름이 ‘고려문’으로 불리고 있고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 입구에 서 있다.

대마도는 고려말과 조선초에 3차례의 정벌을 단행했던 섬이다.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의 잦은 노략질을 근절하기 위해 조선조정은 이종무를 보내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해방과 함께 대마도는 한 때 잊혀진 섬이 됐다.

60~70년대 들어 대마도는 다시 일부 역사학자나 관심있는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했고 한국인으로는 몇안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기도 했다.

출처 : 가우리의부활
글쓴이 : 미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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